2월서코(13-14)/릭벨배포(20) 발간 릭벨 글앤솔 인포페이지입니다.
<벌을 받기 위한 7가지 수단>
7대죄악 테마 릭 톰슨 x 벨져 홀든 7인 글 앤솔로지
예약기간: ~2/11(서코) ~2/17(릭벨배포)
예약폼 : http://me2.do/57aflraO
R19/문고판/160P전후/13,000원
전프레:표지엽서 | 예약특전:7대주선테마 카피본
표지 : 마부(@eaglet2775)
멤버
맘보 / 옹누 / 용사 / 이느 / 이즈 / 진희 / 페르
수령처 :
2코: 3관 J36,37
배포전 : 발표후 추가
#01. 맘보(@cyp_mambo | http://manbounikki.tistory.com) :
나태/몽상가의 휴식 - 릭과 벨져가 휴양가는 이야기
아침부터 비가 잔뜩 내렸다. 오늘이 쉬는 날이라 다행이군. 릭은 커피를 내리며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밖을 바라본다. 하품이 절로 나왔다. 오전 8시. 조금은 더 자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 휴일의 아침이다. 런닝에 속옷 차림으로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킨다. 묘하게 후덥지근한 오전, 비마저 주룩주룩 내리니 숨이 다 막힐 지경이었다. 어디 좀 시원한 곳으로 가볼까. 그런 생각을 하며 식탁에서 지도를 펼칠 즈음. 띵동띵동 초인종소리가 울렸다.
찾아올 사람이 있던가?
릭은 커피잔을 들고 굳게 닫힌 현관문 쪽으로 시선을 준다. 신문일 리는 없고. 방문판매원이나 종교권유일까 생각하니 눈이 조금 찌푸려졌다. 띵동띵동. 그 사이에도 초인종이 시끄럽게 릭을 재촉한다.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누구시오?”
볼멘소리로 퉁명스레 말을 내뱉는다. 두터운 철문 너머로 답변을 기다렸다. 귀를 기울인다. 답이 없다. 들리지 않았나? 누구시오. 다시 한 번 물었다. 눈을 잔뜩 찌푸렸는데, 짧게 돌아온 대답은 예상도 하지 못한 사람의 음성이다.
“나다.”
릭은 화들짝 놀라 문을 연다. 걸어두었던 체인이 잘그락 소리를 냈다. 비에 홀딱 젖은 옷. 하얀 머리카락 끝으로 빗물이 뚝뚝 떨어진다. 가뜩이나 창백한 피부가 물에 젖은 탓에 더욱 희게 보인다.
릭은 열린 문을 붙잡고 저도 모르게 그 얼굴을 응시했다. 긴 속눈썹 끝으로 물이 맺힌 것만 같다. 서늘한 시선이 릭의 시선을 받아친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바라보는 녹색 눈이 의아한지. 미간이 좁아진다.
벨져 홀든. 릭은 이 남자가 어연 일로 이런 곳까지 제 발로 납셨는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평소에 얼굴을 자주 맞대던 건 사실이다. 주로 벨져의 부름에 릭이 답하는 식으로. 아니, 두 사람의 관계가 단순히 그것만은 아니지만 이렇게 벨져가 제 몸으로 직접 릭을 찾아오기는 처음 있는 일이다.
“벨…져? 여긴 웬일로…….”
“오면 안 될 문제라도 있나? 실례하지.”
집으로 들어오는 벨져에게 몸을 비켜준다. 벨져가 완전히 현관으로 들어오고 릭은 문을 닫았다. 젖은 그로부터 물방울이 현관의 타일로 뚝뚝 떨어진다.
그야말로 물에 빠진 생쥐가 아닐 수 없다. 머리 꼭대기부터 발끝까지 전부. 이 무더운 여름날에 몸에 걸친 긴 셔츠가 팔에 달라붙어 있다. 이리 주시오. 릭은 벨져를 현관에서 잠시 기다리게 한 뒤 젖어서 무거워진 조끼를 건네받아 빨랫대에 걸어둔다. 화장실에서 마른 수건을 하나 집어 다시 현관으로 향했다. 완벽하게 휴일을 보내는 릭의 차림을 본 벨져가 미간을 좁힌다. 푸른 눈이 릭을 위아래로 훑고, 혀를 찼다. 쯧.
“아무리 휴일 아침이라고는 하지만. 실로 너다운 꼴이 아닐 수 없군, 릭.”
“쉬는 날 아침부터 대뜸 찾아오고선 그런 말 마시오….”
벨져는 듣는 체 만 체 받은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닦을 뿐이다.
적당히 수건으로 몸을 닦은 벨져를 거실로 안내했다. 여전히 옷에는 물기가 가득하기에 릭은 자신이 평소에 입던 셔츠와 바지를 그에게 건넨다. 하얀 셔츠에 청바지. 무어라 할까 괜스레 걱정도 해보았지만 벨져는 딱히 군말 없이 옷을 벗고 릭이 준 옷으로 갈아입는다.
아무리 연인 사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부끄러움 한 점 없어서 쓰나.
릭은 한 발 옆에서 훌렁훌렁 옷을 벗고 갈아입는 벨져를 보며 마른 웃음을 띄운다. 이런 무의미하다 싶을 정도의 당당함이 벨져 홀든답다하는 것이겠으나 연인된 자로서는 쑥스러워하거나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연인이라고는 해도 그렇게 꿀이 떨어지는, 달콤한 관계는 아니다. 릭이 별다른 기대를 않고 던졌던 지나가는 고백에 아주 놀랍게도 벨져가 고개를 끄덕였고 그게 시작이었다. 벨져,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것 같아. 농담이라면 얼마든지 농담으로 받아들일, 아니 십중팔구 대부분의 사람은 농담으로 생각할 말이었다. 말을 내뱉은 릭은 조금 후회했다. 그저 말을 하고 싶어서 했지마는 괜히 입에 담았나? 농담으로 흘려넘겨지면 그건 그거대로 씁쓸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돌아온 대답은 아주 놀라운 것이었다. 놀랍군, 나도 그렇다.
놀라기는 내가 더 놀랐는데 말이야.
그리고 릭은 이제 다른 방면으로 후회하고 있다. 그때 그런 식으로 적당히 하지 말고 장미라도 잔뜩 안겨주면서 제대로 고백했어야 했나 하는. 그도 그럴 것이 연인 사이가 되었다고는 하나 두 사람 사이의 기류에는 전혀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키스나 육체관계 같은 신체접촉은 있었다. 문제는 그것마저도 지극히 평탄한 느낌이었다는 거지.
키스를 해도 눈만 깜빡이고. 끌어안아도 크게 반응이 없었다. 이거 설마 잘못 들었거나 오해한 부분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벨져, 우리는 연인이 맞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입에 담은 질문에도. 당연한 걸 왜 또 묻는지 모르겠군. 이런 식이니 더 골치가 아프다.
처음으로 살을 섞었을 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벨져의 자신을 향한 감정에 영 확신이 없던 릭은 벨져의 진심을 알기 위해 성행위를 이용하려 했지만, 해답은 그저 오리무중에 빠질 뿐이었다.
그대를 안아도 괜찮소? 질문에 벨져는 눈을 찌푸리고 팔을 벌린다. 아니, 그대와 성적인 접촉을 해도 괜찮냐는 뜻이오. 릭의 말을 들은 벨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인 사이에 무엇을 고민하는 거지, 릭?
살이 맞닿는 열은 모든 것을 잊게 하기에. 그 순간만큼은 벨져의 반응에 느꼈던 묘한 불만도 전부 사라져있었다. 행위가 끝나고 머리와 몸이 차갑게 식어갈 무렵 슬슬 불만이 다시 차올랐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랄까. 연인이라 했지, 정말 연인이라 생각하고 있소? 그런 질문은 잠든 벨져에겐 닿지 않았다.
벨져는 어느새 셔츠의 마지막 단추를 채우고 있다. 색기가 없다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당당하니 흥분도 가라앉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릭은 팔짱을 끼고 손가락으로 제 팔을 톡톡 친다. 말로 하지 않으면 모를 텐데 뭐라 해야 하나.
그대가 나를 조금 어려워해 주면 좋겠는데…아니, 이렇게 말하면 거리를 둬 달라는 뜻이냐고 하겠지.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네 말은 나에게 너와 거리를 두라는 뜻인가? 이럴 때면 또 묘하게 화를 낸다. 아니 벨져 진정해, 그건 아니고. 릭이 한숨을 쉬면 벨져는 또…….
그럭저럭 상대의 반응이 눈앞에 그려질 정도로는 벨져를 파악하고 있다. 눈을 찌푸리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는 동작이나 쓸데없는 소리 말라며 살짝 올라가는 음성. 그러니 더더욱 골치가 아프다. 연애가 처음은 아니다. 여기까지 상대를 깊게 원하기는 분명 처음이지만 나름 연애에 자신이 있기도 했다. 지금도 그 믿음에는 흔들림이 없다. 그저 상대가 저 벨져 홀든이라는 것이 난관일 뿐이지.
옷차림을 가다듬는 벨져는 릭의 생각 따윈 조금도 모르고 있으리라. 아니지 알고 싶기는 한 걸까? 점점 더 부정적인 방향으로 흐르는 생각을 깨려 릭은 입을 연다.
“그래서. 용건이 뭐요? 전화도 아니고 이렇게 직접 찾아오다니.”
“네놈의 그 나태함에 발을 맞춰주러 온 거다.”
말 한번 예쁘게 하기는. 즉답으로 나온 말에 릭은 실없는 웃음을 흘린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복장을 한번 스윽 보았다. 물론 손님을 맞이하는 옷은 아니지만, 이미 서로 볼 거 다 본 사이가 아니던가. 그저 일상적인 모습일 뿐인데 저런 식으로 말을 한다니. 딱히 까내릴 생각이야 없겠지만서도 연인을 대하는 태도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대의 말마따나 나같이 우매한 사람은 그대의 그런 표현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 설명은 없나?”
일부러 날카롭게 비꼬는 표현에도 벨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소파에 몸을 내릴 뿐이다. 소파에 앉아 다리를 다른 쪽 위로 올리고, 릭을 쳐다보는 시선에는 그저 한심하다는 글자가 가득했다. 사람 속도 모르고. 릭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웃는다.
“네가 평소에 노래하던 대로 휴가를 떠나자는 뜻이다. 이제 알아듣겠나?”
벨져의 어투는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으나 그 내용은 벨져의 말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것이었다. 릭은 눈을 동그랗게 뜬다. 놀라는 릭을 옆에 두고 벨져는 주절주절 말을 이어나간다.
장소선정은 너에게 맡기지. 뭐, 비가 이렇게 내리니 적당히 맑은 곳이 좋겠군. 산, 바다, 아니면 사막이건 북극이건 네 맘대로 고르도록.”
벨져 홀든이 이럴 리가?
저 벨져 홀든의 입에서 ‘휴식’이라는 단어라니. 그를 알고 지낸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처음 있는 일이 아닌가. 그리고 아마 여태까지 누구도 저 말을 벨져의 입에서 듣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릭은 확신한다.
일 중독이라는 단어조차 벨져에게는 어딘가 부족하다. 그야말로 해야 할 것들을 위해. 오로지 그것들만을 위해서 태어난 듯한 인간임이 분명하지 않았나. 정확하게 필요한 만큼만을 사무적으로 쉬던 사람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 일상에 조금 쉬는 게 좋지 않겠냐고 릭이 몇 번을 말했던가. 그럴 때마다 벨져는 너무나 당연하게 이리 말하는 것이었다.
#02. 옹누(@_ongnu | http://blog.naver.com/ongnu) :
교만/영원한 교차점 - 계속 돌아가는 이야기
“벨져, 날이 추운데 왜 여기에 나와 있소.”
릭의 부름에 벨져가 천천히 몸을 돌려 섰다. 벨져의 머리칼 위로는 짙은 어둠이 배어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홀로 여기에 서있었을까. 릭은 그의 곧은 등에서 찬바람이 불어오는 것만 같아, 다가가는 것을 잠시 망설였다. 그 사이에 벨져가 입을 열었다. 그의 등 뒤에서 쏴아아, 바다가 밀려오는 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너야말로 이 시간에 더 자지 않고 왜 나온 거지?”
“…….”
“낯빛이 어둡군, 릭.”
“…악몽을 꿔서.”
흐응. 그는 릭의 말에 살짝 웃은 뒤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아직도 그 나이를 먹고도 악몽이 두려운가? 벨져가 장난스럽게 덧붙였지만 릭은 웃지 않고 발이 묶여있는 듯 자리에 우뚝 서있을 뿐이었다. 벨져는 그제야 약간 의아함을 느끼고 릭의 곁으로 향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각사각, 모래 우는 소리가 발꿈치 뒤에 바싹 붙어 따라왔다.
바로 앞에 서자 릭이 서둘러 벨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피한다고해서 벨져가 가만히 놔둘 리도 없었다. 그는 곧 릭의 앞에 섰다.
“릭.”
“…….”
“날 제대로 봐.”
벨져는 어슴푸레한 어둠속인데도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양 말했다. 릭은 마지못해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릭은 벨져의 파란 눈동자가 당혹스러워 하는 걸 수 초간 들여다보다가 그를 끌어안았다. 벨져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릭의 얼굴 때문인지 순순히 품에 안겨주었다.
릭은 천천히 벨져의 등을 끌어안은 뒤 힘주어 그를 붙들었다. 맞닿는 벨져의 피부는 서늘했지만 따듯했고 목덜미에선 익숙한 향기가 났다. 그건 릭을 안심하도록 만들었지만 더욱 불안하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었다.
(중략)
“릭!”
벨져는 결국 견디다 못해 그의 어깨를 강하게 밀어내며 짜증을 냈고, 릭이 움직임을 멈춰 섰다. 달뜬 숨소리가 잦아들고 순식간에 정적이 찾아왔다. 둘 사이에 덩그러니 침묵만 남겨졌을 때, 벨져는 밀어내던 손을 멈추고 릭의 어깨를 꽉 쥐었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긴장감 속에서 릭이 울고 있었다.
눈물이 벨져의 가슴팍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벨져는 아픔과 열 때문에 흐려지는 시야를 헤쳐 릭의 뺨을 닦아냈다. 얼굴위로 다 닦이지 않은 눈물이 그의 뺨을 축축하게 적셨다.
“…울지 마.”
“…….”
“오늘 넌, 정말, …이상하군.”
벨져는 그렇게 말하고 미간을 구겨 웃었다. 릭은 곧바로 입술을 떨며 말했다. 벨져, 작게 부르는 목소리는 형편없이 갈라져있었다.
“벨져, …아무데도……,”
“……?”
“아무데도 가지 않겠다고 내게 약속해.”
릭이 다시 벨져를 끌어안고 흔적을 남기기 시작했다. 벨져의 목덜미며 가슴팍은 이미 릭이 이를 세워 남겨놓은 자국들로 빼곡했다. 벨져는 짓씹은 곳을 혀로 문지르는 릭 때문에 작게 신음하며 대답했다. 아무데도 가지 않아. 릭은 원하는 말을 듣고도 계속해서 벨져를 괴롭혔다. 벨져의 몸은 릭의 손에 그대로 맡기고 있는데도 릭은 벨져를 구석으로 몰며 붙들고 있는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릭은 숨 쉴 새도 없이 중얼거렸다. 벨져가 차마 다 대답해주기에도 벅찰 정도였다. 무엇보다 그 중얼거림은 대답을 원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릭의 목소리가 잔뜩 쉬고, 갈라져 있었기 때문에 결핍된 사람처럼 들렸다. 릭은 더욱 메마른 목소리로 간곡하게 부탁했다. 제발, 제발 벨져. 거짓말이라도 좋아…
“모든 것에 있어 당신에게 내가 가장 먼저라고, 나만을 가장 우선시한다고…, 그렇게 말해줘.”
#03. 용사(@Im_herotic | http://heroicage.tistory.com/) :
시기/the automatic love - 오메가버스AU. 삽질하는 베타릭과 알파벨져.
처음 방문하는 나라에서 릭은 잡다한 기념품들 이전에 늘 시계를 샀다. 면세점의 고급품이건 노점에 펼쳐 놓은 싸구려이건 주머니의 여유가 허락하는 만큼이었다. 사온 시계는 잡히는 대로 서랍 속에 던져 놓았다. 지구본을 돌려 보이는 빨간 동그라미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그의 서랍은 더 무거워지고 또 두서없어지곤 했다. 릭은 그 무질서한 수집의 양상을 좋아했다. 서글서글한 웃는 얼굴에 사람 좋은 인상을 한 것과는 별개로 그는 집에 누군가를 초대하는 것을 그리 반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릭의 낡은 아파트에 방문하는 사람이 있다면. 심지어 방문객이 그의 수집품들에 대해 말을 보태려고까지 한다면, 시작되는 이야기는 이러할 것이다. 시계가 많군요. 시계를 모으는 걸 좋아한다오. 이렇게 섞여 있어도 알아볼 수 있나요. 모으는 것만 좋아하지 정리는 그닥 내키지가 않았소. 그렇군요. 그래요. 등등.
릭의 책상 마지막 서랍에는 서른 몇 개쯤 되는 시계들이 구분 없이 뒤섞여 있지만, 그것에 대해 굳이 싫은 소리를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릭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건 그들과는 하등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기호라는 것이 그렇다. 릭 톰슨이 쌓아 놓은 시계들처럼, 화가의 작업실에 놓인 타이프라이터나 사이클 선수가 조립한 범선의 모형 같은 것들. 으슥한 구석에 놓인 먼지 쌓인 액자들과 쇼윈도에 진열된 입술이 붉은 도자기 인형들 따위. 딱히 없다고 해서 무슨 지장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각자 취향에 따라 찾거나 관심이 없거나 혹은 등을 돌리게 되는 것들.
릭은 여행과 시계 수집과 커피 한 잔을 곁들인 글레이즈드 도넛을 좋아했다. 주말 오락 프로그램이나 사교에는 별 관심이 없었으며, 굴 요리와 하키 경기, 특히 연장 근무라면 치를 떨었다. 누구에게나 그런 것들은 있다. 그러므로 그는 벨져 홀든이 날 때부터 지녔던 하나의 뚜렷한 특성에 대하여 별다른 감상을 갖지 않았다. 그럴 필요조차 없는 일이다, 고. 생각했다.
"일이 있으니 잠시 기다려라."
말하고 벨져는 방을 나섰다. 먼저 불렀으면서 차 한 잔을 내주는 법이 없었다. 손님에게 하는 것치고는 야박한 대접이지만, 릭은 벨져가 그만큼 그를 편안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았다. 릭은 주인이 자리를 비운 방에서 느긋하게 앉아 시간을 때운다. 한량처럼 구는 것은 원체 특기나 다름없었지만, 연인의 방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더욱이 가슴을 들뜨도록 하는 구석이 있다. 지긋하다면 지긋할 나이에 들어섰는데도 그랬다. 사랑이란 늘 사람의 한 켠에 나이를 먹지 않는 부분을 남겨 놓는 모양이었다.
숨을 들이키면 벨져의 방에서는 언제나 특유의 향기가 났다. 원목 가구와 실내 방향제, 벨져의 체취가 뒤섞여 만들어졌을 향을 릭은 퍽 좋아했다. 입을 맞추거나 포옹을 할 때, 벨져가 머물렀던 자리에서 호흡을 가다듬을 때면 맡을 수 있는 서늘한 향이 방향제의 달착지근한 향기 끝에서 도드라져 풍겼다. 이름표를 붙인다면 겨울이나 새벽에 가까울 것이다. 언 바람의 향기래도 좋았다. 릭 톰슨은 도무지 더운 피가 흐르는 사람처럼은 느껴지지 않는 향을 뿌리는 사람을 사랑했다. 적어도 릭에게는 그랬다.
누군가는 벨져에게서 찬 기운이 끼치지 않는 냄새를 맡을지도 모른다. 고기 대신 야채를 먹는 사람들이나 빨간색보다 파란색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처럼, 어떤 종류의 향기를 좋아하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으레 서로의 체취에 이끌려 사랑에 빠지고, 같은 특성을 가진 아이들을 낳는다. 전체 인구의 0.05%가량을 차지하는 이들을 사회는 하나의 종으로 분류해 이름을 붙여 주었다. 기록된 최초의 사랑 노래는 알파와 오메가로부터 비롯되었다. 릭의 연인은 그토록 유서 깊은 로맨티스트 집단의 일원이지만, 단지 나기를 그렇게 태어난 것 뿐이다.
당연하게도 모든 알파들이 오메가와만 맺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종간의 결합이라고 말하기에도 우스운 일이었다. 사랑과 생리는 명백하게 다른 곳에 위치한다. 따지자면 취향의 차이에 가까운 이야기라고, 릭 톰슨은 생각한다. 무엇보다 릭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릭을 볼 때 벨져의 눈빛이나 목소리, 작은 동작 하나하나며 호흡마저도 달라지게 하는 어떤 것이 있다. 그것을 사랑이 아닌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04. 이느(@Eenne_in | http://atlasinyourmemory.tistory.com/):
탐욕/Sweet dream - 평범한 릭과 평범하지 않은 벨져.
“어디 불편한 곳은 없소.”
“잠을 잘 수 없다.”
대답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엷은 실핏줄이 다 터져 있는 탓에 원래 가지고 있던 푸른 눈이 가려질 지경이었다. 릭은 말없이 주머니를 뒤져 흰 약봉투를 그의 앞에 내밀었다.
“…….”
벨져는 대답 없이 손을 뻗어 봉투를 받아 들었고 릭은 그런 느릿한 움직임을 전부 시선에 담았다. 손가락 끝에 봉투가 바스러질 때 얇게 떨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고, 제법 묵직한 무게에 표정 없이 굳은 입가가 얄팍하게 호선을 그리는 것을 보고야 말았다.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군.”
릭은 나지막하게 대답을 하고서 뒤를 돌아 벨져를 등졌다. 등 뒤로 작별의 인사는 주어지지 않았으며, 릭은 자신 때문에 반 쯤 열려져 있는 문을 닫고 복도를 걸었다. 벨져는 아마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그를 안정시켜 줄 것들은 현재 당사자의 손에 들려 있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바깥의 바람이 차 릭은 입고 있던 겉옷을 여몄다. 그는 웃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고, 지금쯤 침대 안으로 기어들어가 누워 있을 벨져를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아름다울 것이다. 항상 그랬듯이, 그 사람이 벨져 홀든이기에 가능한 상상이다.
벨져 홀든이 없는 곳에서 비로소 릭의 얼굴에 안온한 미소가 번지기 시작하였다. 거리는 암울한 사람들로 흘러 넘쳐나고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큰 상관은 없었다. 릭 톰슨에겐 이것을 즐길 많은 시간들이 남아 있었고 그의 곁에는 아직은 제정신인, 총명한 연인이 남아 있었다. 예전의 영광을 버리지 못해 그래서 아직도 꺾이지 못한 고결한 사내가.
절로 휘파람이 나왔다. 자신의 휘파람 솜씨는 굳이 엄격히 말하자면 엉망에 가까운 편이었지만 듣기에 마냥 괴로운 편은 아니었기에 릭은 기꺼이 기분에 따라 마음대로 휘파람을 부는 편을 택했다. 하기야 타고난 여행자인 그는 사람들 사이에 쉬이 섞일 수 있는 재주를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어떤 사람도 그인지 혹은 그가 아닌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때문에 릭 톰슨은, 언제고 어디서고 여유로울 수 있었다. 그것은 그의 능력에서 비롯된 자신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행운이 항상 그의 편임을 알고 있기에 가능한 행동이기도 했다. 그는 주머니 속에 얌전히 놓여 있는 오십 센트짜리 동전을 만지작거렸다. 행운은 준비된 자의 것이었다. 항상, 언제나. 우연이나 예외는 없었다. 릭 톰슨은 준비된 행운을 움켜쥘 것이고 이번에도 결코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항상 그렇게 살아왔다. 이변도 실패도, 그리고 후회도 없이.
소리가 공중을 따라 궤적을 돌다 이윽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풍경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남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지만 아무도 그것을 크게 괴상한 일로 여기지 않았다. 어쨌든 그것은 자신의 일과는 하등 관련이 없을 테니까. 그 누구도 자신의 입에 독약이 부어지기 전까지는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었다. 릭은 사라졌고, 거리는 이내 잠잠해졌다. 메아리처럼 그 기척이, 소리가 잠시 머물다 날아가 버렸을 뿐.
* * *
전쟁이 끝났다. 지금까지의 거창하기만 했던 역사 속에서 명분과 희망을 생각해 본다면 다소 허무하기까지도 할 정도로 궁극적인 승리도 완전한 패배도 없는 미적지근한 마무리였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그 때의 그 순간, 종전의 기억은 아마 다른 사람들과 그리 크게 다르지만은 않을 것이라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마지막 종착역, 시험을 앞에 두고 물불 가리지 않은 채 가히 본능적으로 뛰어드는 벨져를 잡고 그 주변에 가지 못하게 붙들어 두었다.
‘가지 마시오.’
그것이 릭의 첫 부탁이자 마지막 명령이었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자신에 있어 그는 관람객들이 다 들어 찬 무대 위, 갑자기 치고 든 조연 배우의 돌발 행동을 바라본 주연 배우처럼 멍청히 굴었다. 벨져는 검에 기댄 채 주저앉은 상태였고, 릭은 그런 그를 뒤로 한 채 스스로 발광하고 있는 문 너머의 세계를 바라보며 가볍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본인은 이것을 기막힌 반전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단 하나는 분명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릭은 기어코 벨져를 대신할 참이었다. 적어도, 그 때의 ‘타키온’은 그랬었던 것이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저 앞에 바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어쨌거나 여기까지, 그러니까 모든 일의 배후가 틀림없는 저 지긋지긋한 최후에 도달한 것은 결국 벨져 홀든 혼자가 아니었을 뿐이었다. 왜 어째서 릭 톰슨도, 아니. 자신이 이 종착역에 더 가까이 위치하고 있는가. 짜여 있던 그 계획들에, 치밀하게 준비된 일정에, 마치 마련해 두고 있었던 것처럼 기가 막힐 정도로 릭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 앞에 서 있었다. 벨져 홀든, 루사노에서부터 여기까지 그의 말대로 왔다. 자신의 의지대로 그를 따라서, 숙명을 쫓아 이 곳에 도착했다.
릭은 아마 저 문도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벨져 옆에 있었던 것도, 그를 만났던 것도, 그 때 영국에 도착했던 것도. 우연은 쌓이고 쌓여 필연을 만난다. 수십, 수천, 수만 개의 경우의 수들 사이에서 선택해 만들어진 운명이니 그 누구의 잘못이라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 사실은 릭 톰슨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 때 자신의 앞에는 그 누구도, 아무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했으며 다가가지도, 따라서 열고 닫지 못했던 미지의 존재가 확실히 놓여 있었다. 이 세상이 아닌 힘을 가진 제 3의 문, 일반적인 사람이 저 지옥의 입구를 앞에 마주하고서도 온전할 수 있겠는가? 문은 자신을 닮았다. 어디에나 존재할 수 있었지만 명확한 이유를 모른 채 움직이거나 시기를 맞춰 나타나기도 한다. 모르지만 알 것 같았다. 이것은 자신이 닫아야만 했다.
사실 릭은 벨져와 다닌 이후로부터 가끔 흩어지는 벨져의 꿈을 꾸었다. 깨어나고 나서도 납득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마냥 유쾌하지는 않았다. 다른 의지에 의해, 변수에 의해 그렇게 변하고야 만다는 것은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그를 사랑하는 릭 톰슨에게는 그랬다.
벨져는 문 앞에서는 지극히 평범했다. 짊어지도록 교육받은 운명은 거창하고 막연했지만 능력은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망설이는 것이 정상이었으나 그 반동 작용인지 벨져는 생각하거나 멈출 줄을 모르는 풋내기처럼 굴었다. 릭에게 여전히 벨져는 어렸다. 그는 단 한 뼘도 자라지 않은 다섯 살의 도련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겁을 먹을 필요가 분명히 있었는데 무모하고 고집스러워 아직도 생과 사를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하는 어린아이. 릭은 벨져가 조금 더 자신을 소중히 여겨주길 바랐다. 그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 아비규환 속에서 살아남아 그것을, 응당 평범한 가정의 평범한 사람으로 자라면 알 수밖에 없는 그 길과 삶들에서 모든 것을 배우길 바랐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쉬이 풀린 일들에 약간 얼떨떨해진 기분이었다. 빠르게, 그리고 쉽게 문 앞에는 저만 남아 있었고 저만 닿아서 오히려 이것이 문제일 정도였다. 씹어먹을, 걱정했던 것만큼 어렵지 않아 손 안에 쥐어지는 손잡이의 감촉에 절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끝, 끝이라.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유언을 앞에 두고서도 초연하게만 굴었다. 이왕이면 좀 더 비극적인 사내로 역사에 기록되고 싶었는데. 슬며시 차오른 상실감에 약간 풀이 죽긴 하였지만 릭은 이내 곧 체념하고 문을 열었다. 이제 곧, 마지막이 온다. 벨져를 영원히 가질 수 있는 마지막 순간, 멋들어진 고백을 하고 작별을 고할 찰나의 기회. 적어도 스스로가 내린 결론에 있어서는 벨져를 영원히 가질 수 있는 방법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마지막, 릭 톰슨의 마지막을 영원히 기억하게 될 벨져 홀든. 나름 마음에 드는 이야기의 종장을 두고 릭은 갖가지 생각을 했다. 벨져 홀든에 대한, 그를 위한, 그리고 남게 될 그의 소중한 시간들과 닳고 닳아 희미해질 자신과의 짧은 전장의 기억에 대한.
손잡이를 돌리려고 했다. 그래, 끝이라고 생각한 그 때였다.
쉭, 뺨을 가르는 굉음을 분명히 들었다. 공기와 금속이 만나 마찰하며 생긴 쇳소리의 끝에 자리한 것은 너무나도 익숙한 벨져의 검이었다. 그가 검을 던지고야 만 것이다.
릭은 자신 앞에 박힌 칼날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무슨, 미처 당황할 새도 없이 갈라진 부위에서부터 문은 속절없이 흘러 내려지기 시작했다. 그것조차 기괴해 릭은 다급히 뒤를 바라보았고, 그 뒤에선 벨져가 평소보다 더 맑고 곧은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
그 정의를, 자신의 책무를 온 몸으로 지켜낸 그의 의지를 다시 뒤로 한 채 릭은 같이 휘말리기 시작해 어느 공간의 틈새로 빨려 들어가듯 소멸하는 벨져의 검을 바라보았다. 숨이 막혀왔다. 어쩌자고 이런, 어째서. 그는 그런 것까지 계산하고 있었던 셈인가. 결국 그도 섬광이었고, 원래 이 책무를 마무리 짓기 위한 마지막을 수도 없이 되새김질하며 살아 온 사람이었단 말인가. 릭은 그 때 자신이 온전하게 벨져 홀든에게 패배했음을 느꼈다. 주위의 관객들도 분명히 그 장면을 보았을 것이고, 다소 허무히 무너져 내린 문을 바라보며 숨을 삼켰으리라. 안타리우스, 지하연합, 헬리오스, 기타 세력들, 능력자들. 너나 할 것 없이 연극의 막바지에 선 사람들은 그 장면을 전부 보았을 것이다.
문을 닫은 사람은 벨져 홀든이었다. 릭 톰슨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홀든의 차남은 기어코 문을 닫고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릭은 미련 없이 그의 앞으로 움직여 쓰러진 벨져 홀든을 안아든 채 빠르게 흩어지는 시야를 보며 눈을 감았다.
#05. 이즈(@0214x0103 | http://blog.naver.com/on_z_178) :
색욕/목표의 차이 - 릭의 감정을 불순하다 생각하는 벨져.
벨져 홀든은 악마를 보았다.
정확히는 릭 톰슨이 보았다고 하는 편이 맞겠으나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그것은 분명 악마였다. 악마의 형상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가능하지 않은 일이 릭 톰슨과 벨져 홀든에게 일어났었다. 벨져는 찬찬히 기억을 더듬는다.
인식의 문을 닫기 직전 일이다.
릭과 벨져의 여행은 성공적이었고, 그들은 끝내 문 앞에 다다랐다. 인식의 문에 가까워졌던 것은 벨져와 안타리우스 둘뿐이었으므로 릭
톰슨은 세 번째이자 마지막 인물로 기록되었다. 문 앞에 서 있던 릭의 등이 벨져의 머릿속으로 고스란히 떠오른다.
벨져가 게이트에서 나왔을 때 릭은 이미 문에 다가서 있었다. 필시 호기심과 경외심으로부터 비롯된 행동이었으리라고 벨져는
넘겨짚는다. 릭 톰슨은 문에 대해 얼마 알지 못한다. 그저 벨져 홀든이 그것을 닫아야 하는 숙명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이 그것을
돕고 있다는 현 상황이 전부다. 그러나 기실 벨져 또한 아는 것은 많지 않았다.
문은 진리라는 이름을 가진 것이 아니었으므로 벨져가 그것과 접촉함으로써 깨달은 것이라고는 생김새와 그로부터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마저도 부족해서 미지에 대한 두려움은 문틈 사이를 엿보는 것만을 허락했다. 어린 벨져 홀든에게는 그랬다.
……하지만 릭 톰슨은? 벨져는 답지 않게 타인의 입장을 짐작해본다. 그래야 릭 톰슨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릭
톰슨은, …달랐을 것이다. 미성년이 아닌 서른셋의 나이로, 훈련 중에 맞닥뜨린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부술 자의 옆에 서서 문을
마주한 입장은 분명 달랐을 것이다. 그 차이가 문에 대한 호기심을 일으켰으리라고 벨져는 짐작한다.
문은 벨져가 열었을 때보다 더 열려있었다.
안타리우스에 의한 것이겠지. 벨져 홀든은 검을 뽑아들면서 다가섰었다. 릭이 여전히 문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벨져는 무겁게 한 마디를 뱉었다. 숙명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비켜라, 릭. 그러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릭. 재차 부르는 음성에도 돌아보는 얼굴은 없다. 짙은 기시감이 벨져가 섬광답게 움직이도록 만들었다.
그때 악마를 보았다.
벨져는, 그리고 안타리우스 또한 문에서 힘을 얻었기에 그들은 그것이 다른 것을 쥐여줄 수도 있다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벨져에게 있어서 문은 그저 파괴해야 할 존재였다. 그러나 문은 기실‘다가서는 자가 원하는 것을 인식하는 문이었다.’
릭이 마주하고 있는 것은 벨져 홀든의 형상이었다.
그것은 악마였으나 벨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차이점이라고는 벨져 홀든의 상징에 가까운 두 자루의 검을 차고 있지 않은 것과,
기분이 나쁠 만큼 적나라한 의상에 표정을 한 것뿐이다. 벨져가 없었더라면 당장에 나신을 드러내어 릭에게 엉겨 붙을 것처럼 그것은
노골적이었다. 벨져가 릭을 부르면 그것 역시 릭을 불렀다. 릭. 이리로.
벨져보다 훨씬 간드러진 음성이다. 어깨선에 걸쳐 흐르는 옷자락을 추스르지도 않은 채, 그것은 릭 톰슨에게 손을 뻗었다.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기 짝이 없는 기억이었으므로 벨져는 잠시 회상을 멈추고 입을 틀어막는다. 짧은 헛구역질이 입안을 맴돈다.
릭이 그것을 향해 걸음을 떼기 전에 벨져는 문을 닫았다. 신경질적으로 닫히는 문 뒤편에서 그것이 높은 미성으로 웃었다. 릭의
시선이 그제야 문에서 떨어진다. 그것은 위태롭게 흔들릴 뿐 벨져를 향하지 못했다. 좀 전까지 뚫어져라 보던 얼굴과 같은 얼굴임에도
그랬다.
그게 둘의 마지막이었다.
인식의 문이 닫힌 후 전쟁이 끝나자 릭은 달아나듯 벨져의 곁을 떠났다. 그는 본디 완벽하게 자유로워지고 싶어 하는 자였으므로 벨져에게는 그를 잡을 권리가 없었다. 미안하오. 그게 릭 톰슨이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벨져는 일련의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릭이 본 문의 안쪽에 자신의 형상을 한 악귀가 있었으며, 왜 사과를 하고 떠났는지.
상황의 시작은 문이다. 그래서 벨져는 문에 대해 조사를 했고, 문이 보고 있는 자의 염원을 인식하여 비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힘을 추구한 안타리우스에게 힘을, 마찬가지로 힘을 기대하고 훈련에 임한 벨져에게 힘을 부여했다. 그러나 릭 톰슨에게는.
……. 문이 비추는 것을 얻고 현혹되느냐, 아니면 그것을 닫고 부수느냐가 벨져 홀든의 손에 달린 숙명이었다. 문은 닫혀서
파괴되었고, 릭은 본 것을 얻지 못했다.
릭 톰슨은 벨져 홀든을 원했나?
벨져는 확신하지 못한다. 마지막에 사과한 것은 아마도 들켰다는 생각 때문일 터다. 문이 무엇을 비추는지, 그 역시 그 순간 깨닫게
된 탓에. …분명 문 안의 그것은 벨져 홀든의 모습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 행동거지 하며 옷을 차려입은 모양새는 완벽히 품위에
어긋나는 것이다. 벨져 홀든이 이유 없이, 그것도 대뜸 그럴 리가 없다는 소리다. 애초에 같은 장소에 둘이 있는 것도 클론이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일이고.
그건 벨져 홀든이 아니었다.
하지만 릭 톰슨의 염원을 비추어서 나타났고, 벨져의 겉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 괴리감이 벨져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다. 릭 톰슨이
벨져 홀든을 원한다 치자. 그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벨져는 릭을 꽤 좋아한다.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라왔을 텐데도 제법 잘
맞는 점이 나쁘지 않은 데다, 그의 능력은 진심으로 구미가 당기는 것이기도 하다. 릭 톰슨이 그 강력한 능력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러니까, 릭이 염원이 유별난 것이 아니라면, 벨져 또한 거기에 응해줄 수 있다는 뜻이다. 문제는 그
염원이 불순한 의도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벨져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상황 자체만을 놓고 보자. 거의 벗다시피 한 벨져 홀든. 릭 톰슨에게 엉겨 붙는 벨져 홀든. 그것을 염원한 릭 톰슨.
……어쩌면 릭 톰슨이 품은 것은 단순한 색욕일지도 모른다.
함께 있는 시간이 길었던 탓에 벨져를 향한, 사실은 그저 욕망에 기반을 둔. 그런. …추측한 결론은 썩 벨져에게도 반가운 것은 아니다. 그래서 여태 그 당당한 발걸음 한 번을 릭 톰슨에게 두지 못하고 고민하는 것이었다.
#06. 진희(@poetreecamel | http://critea.woweb.net/):
분노/일상다반사 - 야근하는 릭이 간신히 퇴근한 뒤에….
릭은 코르크 판의 메모 고정 핀을 마치 다트처럼 집고 몇 번 시동을 걸다가 쉭 집어던졌다. 물론 다트처럼 무겁지 않은 핀은 에펠탑
사진에 탁 부딪혀 떨어질 뿐이다. 하하하... 하고 손을 몇 번 털던 릭은 다시 의자에 앉고 빙그르르 돌다가 아악! 하고 비명을
지르고,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가 다시 너털웃음을 지으며 회전의자에서 뱅뱅 돌았다. 철야와 야근으로 점철된 일주일이 지나간다.
릭의 책상 한켠에서 여행용 프랑스 회화 포켓북이 애처롭게 구겨져 있었다.
원래는 에펠탑 근처의 식당에서 와인에 절인 오리고기와 에스카르고를 먹어 보고 있어야 할 일주일이었다. 릭의 입에서 통제되지 않는,
그러니까 의도치 않은 나지막한 욕들이 방언처럼 툭툭 튀어나왔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주변인들도 다 비슷한 처지였기 때문이다. 릭 옆의 에밀리는 더 이상 물어뜯을 것도 없는 손톱을 물어뜯고 있고, 그 옆옆의
제임스는 종이를 신경질적으로 접어 던지고 있었다. 모두 최소 정서불안, 그게 아니라면 히스테리였다. 하지만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안다면 모두 손바닥에 주먹을 탁 친후 아아, 하고 끄덕거릴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존엄한 황금의 흐름을 따르는 곳,
경제대공황을 앞두고 가장 긴장감이 흐르는 곳. 그곳은 바로 돈이 바로 직결되어 있는 금융권이었다. 가장 취직하기 쉬운 곳이기도
했고, 가장 몸과 마음을 소모하는 곳이기도 했으며, 가장 잘리기 쉬운 곳이기도 했다. 또 반대로 말하자면 그만큼 오래 버틴 사람은
나름대로 인정을 받는다는 이야기다. 릭은 발작을 그만두고 한숨을 푹 쉬었다. 참아야 한다. 안 그러면 지금까지 버텨 온 시절이
아깝다. 대강 내년 정도에는 과장을 달게 될 테니까... 올라 봐야 연봉 상여금 다 합쳐도 쥐꼬리만큼이겠지만.
릭은 이미 풀어헤친 넥타이에 손가락을 걸어 다시 한 번 흔들었다. 아예 벗어버리지 않는 것은 마지막 예의 같은 것이다. 사실 그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쓸모없는 짓이 될 거라는 자체 판단 때문이다. 곧 경제난이 다가올 거라고, 더
이상의 투자는 무리수이며 지금은 현금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 최선이라고 릭은 핏대를 세워가며 주장했다. 평소 그의 소통방식이 위험한
상황에서도 조용하고(아...여기 좀 위험한데...) 급한 상황에서도 나긋하며, (부수는 데 부담은 없겠군...) 그러는 와중에 한
번씩 차가운 말을 던져(됐지? 한동안은 찾지 마시오!) 좌중을 설득시키는 느낌인 걸 생각하면 그의 반응은 꽤나 이례적인
것이었고, 그만큼 상황은 명백했으며, 물론 릭 이하의 직원들도 모두 그것에 동의했으나, 까라면 까야 하는 것이 회사고 조직이었다.
릭은 씩씩거리며 돈을 써서 알아온 투자대상 회사의 재무재표에 코를 처박았다. 대체 이런 부실채권 회사에 왜 투자할 거리를
찾으라는 건지 릭은 알 수 없었다. 십중팔구 임원 중에 한 놈이 탈세나 횡령을 하려는 게 틀림없겠지만, 어쩔 것인가. 릭은 더
이상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숫자들을 매직아이처럼 쳐다보다가 아껴 생각하던 것을 떠올렸다. 말 그대로 아껴 생각하던 것. 어린아이가
숨겨 둔 파이 조각처럼, 소녀가 비밀로 하는 연정처럼, 교제한 지 일 년이나 지났는데도 아직도 떠올리면 물 위의 나뭇잎처럼
가뜬가뜬 마음이 움직이는 것. 릭의 입가에 픽 웃음이 떠올랐다.
지금쯤 역정을 내고 있겠군...
많은 연인이 조금 더, 아주 조금만 더... 하다가 기차를 놓치거나 막차를 놓치거나 배를 놓치곤 한다. 이들도 다르지 않았다.
조금만 기다려 주겠소? 퇴근은 좀 늦겠지만 반드시 돌아오겠소. 하고 출근했던 릭. 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벨져 홀든.
비현실적인 것이 현실의 공간에 있으면 괴리감이 느껴지기 마련이다. 비현실적인 외모의 그가 지극한 현실인 자신의 방에 있는 것을
보고 있으면, 벽장 안에 다른 세계를 숨겨 둔 것처럼 기묘한 고양감이 그를 끓어오르게 하곤 했다.
하지만 그가 혼자 방치된지 2박 3일이 지나간다.
끼니는 챙겨 먹을까? 그는 생각보다 생존에 익숙한 사람이었지만 역시 약간 인외적인 면이 있어,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할 거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쫄쫄 굶고있으면 어쩌지? 밖에 나갔다가 길이라도 잃었다면? 강짜를 부리다가 경찰에게 끌려갔다면? 릭은
기분전환용으로 연인을 생각했다가 다시 걱정의 굴레에 빠졌고 자연스럽게 다시 히스테리 모드로 들어가 자신의 노력을 셀프 헛수고로
만들었다. 인생은 부질없는 것이다.
#07. 페르(@_Peree_writer | http://peree.tistory.com/) :
식탐/Eternita - 홀로 오래살아온 뱀파이어 릭이 벨져를 자신과 같은 존재로 만드는 이야기.
“벨져, 일어나. 어서.”
벨져 홀든은 한밤중에 깨어났다. 누군가가 다급한 손길로 그를 흔들고 있었다. 잠이 깊게 들었던 그는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겨우겨우 몸을 일으켰다.
“형아…?”
“넌 당장 이글을 데리고 저택을 나가라. 도망쳐야 해.”
다급한 어조에 벨져는 남아있던 잠이 달아나 버렸다. 급히 침대에서 내려와 다이무스가 건네는 외투를 입었다. 항상 조용하던 저택이 유난히 소란스럽다.
“나는 아버지께 가겠다. 그리고, 벨져.”
다이무스는 나가려다 말고 돌아서서 벨져의 어깨를 붙잡았다. 한쪽 무릎을 꿇고 그보다 어린 동생에게 눈높이를 맞춘 뒤 말을 이었다.
“꼭 살아남아라.”
벨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이무스는 벨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을 마지막으로 방을 떠났다. 그는 곧바로 이글을 찾아갔다. 두 살 아래의 동생은 소란스러움에 잠이 깼는지 불안한 얼굴이었다.
“작은 형!”
벨져를 보자마자 달려왔다. 그는 이글에게 외투를 입히고 손을 꼭 붙잡았다. 이제부터 지하로 내려갈 거야. 조용히 가야 해. 잘 따라올 수 있지? 이글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용케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아이는 복도를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창밖의 소란스러움이 그들을 겁먹게 했지만, 벨져는 오히려 이글의 손을 꼭 붙잡고 당당히 걸어갔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밖에서 갑자기 함성이 터져 나왔다. 무슨 일이지? 호기심이 동한 이글은 벨져의 손을 놓고 창가에 붙어 서서 밖을 내다보았다. 정원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저택에서 끌려 나오는 이를 보며 소리를 쳤다.
“아버지다.”
이글의 말에 벨져도 덩달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바로 동생을 데리고 떠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대신 손으로
황급히 이글의 눈을 가렸다. 자신들의 아버지가 목이 베이고, 불에 타 죽는 모습을 보는 것은 혼자로도 족했다.
“어서 가자.”
벨져는 걸음을 재촉했다. 한편으로는 다이무스가 걱정되었지만 그건 우선 살아남은 뒤에 생각할 일이었다. 지금은 이글과 무사히 저택을 빠져나가는 것이 급했다.
지하의 비밀통로를 이용해 저택 뒤쪽의 숲으로 나갔다. 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숲은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사람들은 아직 여기까지 찾아볼 생각은 못하는 것 같았다. 다행이라 생각하며 다시 이글의 손을 고쳐 잡았다.
“큰 형은?”
이글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주황색 불꽃이 저택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멈춰선 동생의 팔을 잡아당기며 곧 따라올 거라고 말했다. 그건 자신에게 하는 말과 같았다.
이제 겨우 열 두 살인 자신과 열 살인 동생이 세상에 나가 뭘 할 수 있을까. 보호자를 잃은 어린 아이는 좋은 먹잇감이나 다름없었다.
문득 바람을 타고 사람들의 외침이 들렸다. 이쪽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 들리는 걸 봐선 발각된 것 같았다. 벨져는 이글과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야할지는 모른다. 그저 여기를 벗어나야한다고 생각했다.
“찾았다!”
앞쪽에서 사람이 불쑥 나타났다. 벨져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부딪혔다. 그 남자는 벨져를 번쩍 들어올렸다.
“이거 놔! 이글!”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리며 이글을 애타게 불렀다. 이글 또한 다른 사람의 손에 붙잡힌 것 같았다. 벨져는 자신을 붙잡고 있는 상대의 손을 깨물었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붙잡았던 아이를 떨어뜨렸다.
흙바닥에 떨어진 그는 얼른 일어서서 이글을 붙잡고 있는 이에게 달려갔다. 축 늘어져 있는 몸을 봐선 기절한 것 같았다.
“당장 내려놔!”
주먹으로 다리를 때려보지만 상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열 살짜리 소년의 주먹이 아플 리가 없었다. 그는 귀찮다는 듯이 다리를 움직여 벨져를 밀어냈다. 그래도 다시 다가가 매달리자, 다른 사람이 그의 머리채를 잡고 떼어냈다.
“이글에게 손대지마!”
“버릇없는 녀석.”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배에 통증이 몰려왔다. 벨져는 배를 감싸 쥐고 몸을 웅크렸다. 구부린 등 위로 발길질이 이어졌다.
“감히, 누구에게, 명령을, 해?”
“야, 그 새끼 일으켜 봐.”
손을 깨물린 남자가 씩씩거리며 다가왔다. 발길질을 하던 이는 벨져의 팔을 붙잡아 억지로 일으켰다. 남자는 온전한 손을 휘둘러 그의 뺨을 때렸다. 고개가 꺾이고 뺨이 금세 붉게 부어올랐다.
벨져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아직 어렸지만, 기세만큼은 성인 못지않아 그들을 주춤하게 만들었다. 남자는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그러다 문득, 뒤쪽의 다른 사람이 이글을 품에 안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얌전하게 굴어. 네 동생이 다치는 꼴 보기 싫으면.”
그 말에, 벨져는 여전히 남자를 노려보았지만, 아까보다는 기세가 약해졌다. 그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다가와 벨져의 턱을 붙잡았다.
어깨까지 흘러내린 은발과 흰 피부, 그리고 붉은 입술은 욕망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거기다 어차피 죽일 아이다.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이어지는 내용이 아닙니다)
“여기 있었소?”
“시, 신부님!”
느긋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남자들은 황급히 벨져에게서 떨어졌다. 갑자기 자신을 괴롭히던 것들이 모두 사라지자 그는 의아함을 느끼며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가 그에게로 걸어오고 있었다.
먼저 광이 나는 새까만 구두가 눈앞에 나타났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옷자락도 보였다.
“꽤 심하게 했구려.”
그는 손을 뻗어 벨져의 얼굴을 가리는 머리카락을 쓸었다. 벨져는 흐릿한 눈을 가늘게 떴다. 어떻게든 이 사람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이며 그를 보기 위해 노력했다.
“어디 봅시다.”
읏챠, 하는 소리와 함께 신부는 벨져를 가볍게 들어올렸다. 이제는 목을 덮은 로만 칼라가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이 사람이 신부라는 것을 깨닫고 왜 사람들이 멈췄는지 알 수 있었다.
“거래를 하겠소?”
벨져는 눈을 깜빡였다.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더없이 달콤했다. 사람의 마음을 사르르 녹이는 그런 어조로 신부는 말을 이었다.
“그대가 나와 함께 간다면, 형제들은 부족함 없이 살도록 해 주겠소. 그리고….”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벨져를 범하고 있던 두 남자와, 이글을 데리고 있는 또 다른 남자. 세 명의 남자를 훑어보았다.
“저 짐승들을 처리하겠소. 이 자리에서.”
“그, 그게 무슨 소립니까!”
벨져 또한 같은 심정이었다. 신부님이 먼저 사람을 죽이겠다고 말을 하다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형제들을 부족함 없이 살게 해주겠다는 말에 마음이 흔들렸다. 신부님이니까, 믿고 따라가도 괜찮지 않을까?
“형아는…?”
“그는 무사하오.”
신부는 벨져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그래서 어찌하겠소? 나와 함께 하겠소? 재촉하는 물음에 벨져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따라가서 죽던, 이 자리에서 죽던, 적어도 형제들은 살릴 수 있는 선택을 하고 싶었다.
“오랜만에 포식을 하겠군.”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남자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단지 그뿐이었는데, 세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정확하게 무엇을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벨져는 그의 옷자락을 꽉 붙들고 “약속, 꼭 지켜.” 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