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28일 리백 발간예정 릭벨 R19 합동지 <Ready, Queue!>
글샘플 01 이느님
치한x유부녀
자신의 몸을 멋대로 주무르려 들었던 낯선 사람이 불쑥 내미는 뜻밖의 물건에 벨져는 그대로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사람으로 가득 찬 지하철이 두어 번 덜컹거리는 소리를 반복하고, 그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는 사람들이 제자리를 찾아도 그것은 이미 관심 바깥의 일이었다. 검은 가죽장갑을 낀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들린 사진들은 애처로이 흔들렸고, 벨져는 그것이 혹여나 바닥 위로 흩어질 새라 낚아채듯 받아들었다.
괴한이 내민 것은 어찌 보면 흔할 수 있는 사진 몇 장이었다. 문제는 그 내용이 결코 유쾌하지 않았을 뿐, 러시아워의 번잡함에 대한 가벼운 짜증도, 지각에 대한 염려도, 그리고 드물게 아침에 일찍 사라진 그에 대한 미미한 서운함도 전부 잊게 만들기에 충분할 정도로. 벨져는 눈을 깜빡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현실을 받아들이기에는 지금 이 상황이 몹시 비현실적으로 느껴져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이 와중에도 손은 침착히 나머지 사진을 확인하는 작업을 이행하기 위해 충실히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웃겼다. 대여섯 장의 사진들, 어디서 어떻게 찍힌 것인지 모를 자신과 릭 톰슨의 적나라하고 비밀스러운 밀회와 짓궂었던 작당이 그 안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단골 호텔, 집 앞, 자주 가는 단골 레스토랑, 회사 안 자신의 집무실, 차 안. 장소는 다양했으나 나오는 인물은 똑같았고 내용 역시 비슷했다. 자신을 아는 사람이라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벨져 홀든의 지극히 사적인 모습과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제 연인의 웃는 낯이 무서울 정도로 선명하다. 키스하기 전에 살짝 보이는 미소, 삽입 전의, 지나칠 정도로 가라앉아 있는 긴장감에 굳은 표정, 묘하게 나른해 보이는 행위 후 지친 그 모습까지 오직 자신만이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그가 이 안에 있다. 누가 봐도, 그를 알고 있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보아도 바로 릭 톰슨임을 알 수 있도록 가지런히 정리된 증거들처럼.
벨져 홀든은 릭 톰슨과의 연애가 떳떳하지 않은 일이라 생각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자신에게 있어서 그와 함께한다는 사실은 부끄러울 일도 아니었기에 굳이 감추기 위해서 애를 쓰려고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언제고 기회가 되면 몇 없는 주위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필히 알려야 한다는 쪽에 가까운 편이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하기 위해 먼저 릭에게 이 이야기를 꺼낸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누구에게도 이 비밀스러운, 연애 아닌 치정 행각들을 밝히지 않았던 이유는 순전히 그의 만류 때문이었다. 처음에 이 화제를 꺼낸 자신의 말을 돌연 막고서 지금껏 보지 못했던 진지한 얼굴로 제 손을 꼭 잡으며 고개를 젓던 릭 톰슨, 거의 모든 일에는 제 뜻을 사람 좋은 얼굴로 그저 받아 주기만 했던 사내가 처음으로 비춘 제 속내.
‘그대가 힘들 것 같소, 그리고 나도 역시.’
말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원치 않는다는 거절의 속내를 밝히면서도 끝끝내 명확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던 연인에게 자신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저 역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붙잡힌 손을 빼고 다른 말을 하지 않고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더랬다. 무엇이 두려운 것인지는 모를 일이었으나 그가 염려하고 있는 미래에 벨져 홀든이 확실히 있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알 수가 있었다. 그는 항상 그래왔듯이, 지나치게 이타적이기만 한 사람이었기에 쉽게 추측하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었으니까. 어쨌거나 일은 이렇게 흐지부지 넘어갔고 벨져는 그 뒤로 다시는 먼저 그 화제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런 하찮은 이유로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들을 낭비하고 싶지가 않았다. 다른 문제들은 열일 제쳐두고서라도 그와 있을 때 정도는 좀 편히 쉬고 싶다고, 아무것도 생각지 않고 그는 나만, 나는-모르겠다. 그렇게 마무리될 줄 알았다. 그래도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설령 아무도 몰라준다 한들 릭 톰슨은 여전히 제 곁에 있었고 그는 여전히 다정한, 여유로운 미소로 절절한 애정을 아낌없이 내어 주던 그 모습으로 남아 있어 주었다. 그랬기에 후회도 불만도 없었다. 네가 원하는 하나 정도는 들어 주지 못할 정도로 아량이 크지 못한 것도 아니었으니.
“…….”
이런 식으로 공개될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었다. 그것도 완벽한 제 3자에 의해, 가장 자신과 그가 원하지 않을 방법으로 알려질 것이라고는. 정작 폭탄을 쥔 이는 태연스레 빈 나머지 손으로는 자신의 둔부를 마음껏 주무르는데 정신이 없었으니 아이러니하기가 짝이 없는 일이었지만. 속이 까맣게 타는 느낌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벨져 홀든은 당황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머리가 텅 비어버려 추접한 짓을 이 인파들 틈 사이에서 태연히 즐기고 있는 빌어먹을 변태에 대한 분노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오직 사진만이, 사진 속 안의 릭 톰슨만이 선명하게 살아 자신의 가슴 언저리에 무겁게 쌓이는 기분이었다. 무력하다, 이토록 무력할 수가 없었다. 방금 전에 느낀 수치심과 분노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고, 참담하게 가라앉아 있는 자신만이 여기 남아 있었다. 아무 일도, 아무 대책도 세울 수가 없었다. 자칫하다 릭 톰슨이 위험하게 된다면, 그의 말마따나 수줍게 자신이 가진 것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라곤 그대 밖에 없었다고 고백하는 이의 진심을 벨져 홀든의 한갓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짓밟는다면? 그 다음은, 아무리 저를 사랑하는 그라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을 것인가. 그 어떤 것도 확신할 수가 없다. 혼란스럽다. 엉덩이에서 느껴지는 발기한 성기의 노골적인 느낌만큼이나, 그리고 그를 익숙하게 받아들여 천천히 흥분하고 있는 자신의 몸도 역시 마찬가지로. 참담함을 느끼며 벨져는 마지막 사진을 확인하기 위해 차 안에서 이별의 입맞춤을 하고 있는 연인의 모습을 넘겼다. 꼭, 영화의 한 장면 안에 지금 자신이 들어와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섯 번째 사진은 사실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한 일주일 정도 지났지 싶은 정도로 극히 최근의. 회사에서 새 프로젝트를 진행하기에 바쁘기만 했었기 때문에 둘 다 극도로 피곤했고 날카로워져 있었기에 서로가 더 필요했던 상황이었다. 방심이 화를 불렀나, 그런 생각을 하며 벨져는 천천히 사진을 넘겼다. 마지막 사진, 무엇이 나와도 전혀 놀랍지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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