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겠소? 설명을 마치고 릭은 고개를 돌려 벨져의 얼굴을 바라본다. 올해로 열넷. 릭보다 일곱이 어린 연인의 얼굴은 한참 어리다. 옆선으로 보이는 푸른 눈이 듣는 둥 마는 둥 반쯤 감겨있다. 설마 졸고 있지야 않겠지만. 그다지 집중하고 있지 않은 것도 확실하다. 역시 듣지를 않는군. 이제 다섯 번째 시간. 처음 두 번까지는 제대로 들었던가? 세 번째까지는 듣는 척이라도 했던 것 같은데. 이젠 듣는 척도 없다. 혹여나 한숨이라도 쉬었다간 그 서늘한 눈이 이때다 싶어 싸늘하게 노려보겠지. 조용히 고개를 돌리고 얼굴을 찌푸린다. 저도 모르게 절레절레 젓고있으니 옆에서 들려온 소리가 정적을 깨었다. 릭. 불현듯 들린 부름에 릭의 어깨가 화들짝 놀란다. 아차, 하는 마음이 크다. 멍하니 참고서에 눈만 대고 있는 줄 알았는데. 역시 기척에 예민하다고 해야 하나. 어흠. 멋쩍게 헛기침을 한번 흘리고 억지웃음을 흘린다. “왜 그러시오.” “듣고 있어.” 릭의 작은 투덜거림 따위 일찌감치 꿰고 있었다는 눈빛으로 벨져가 릭을 흘긴다. 입가에 띄운 묘한 미소에서 여유가 엿보인다. 릭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순간 입을 다문다. 벨져가 턱을 괸다. 흐응. 작은 콧소리. “다 알고 있는 건데. 그냥 본론으로 넘어가면 어떻겠나?” “그대는 아무것도 듣지를 않고 있잖소.” “내 생애를 통틀어 네가 나를 가르쳤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가르칠 것도 없고 말이지.” 두 눈이 빤히 릭을 바라본다. 평소에 릭은 벨져의 눈을 제법 마음에 들어 했다. 새파란 그의 동생이나 반대로 회색빛도는 그의 형과는 또 달리 살짝 녹색이 깃든 시린 푸른색. 저기 지중해쯤의 얕은 바다라면 이런 깨끗한 색이 아닐까 싶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다르다. 지금은 연인이 아닌 다른 직책으로서 옆에 앉아있음에도 그런 상황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이 뻔뻔함. 벨져 홀든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저 오만방자하다고만 느낄 이 태도가 가장 적나라하게 묻어나는 곳이 저 두 눈이었다. 비록 그 입에 담은 건방짐이 사실이기는 하였으나 이러한 쓸데없는 입놀림 하나하나가 벨져의 적을 만드는 것이겠지. 만만찮은 상대로군. 릭은 마음속으로나마 가슴을 쳤다. 그리고 따분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시선을 받아쳐 낸다. 그래 다 알고 있겠지. 참고서의 내용을 떠올려본다. 저 쓸데없이 좋은 머리가 얼마나 성능이 우수한지는 릭이 제일 잘 알고 있다. 굳이 릭이 이렇게 설명할 필요는 분명 없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릭은 지금 벨져를 가르치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것을. 릭 톰슨은 벨져 홀든의 가정교사로서 그의 방에 와있다. 이제 일주일 된 아르바이트다. 물론 벨져에게 가정교사라는 도우미가 필요하냐 하면 그럴 리가 없었지만. 이것은 벨져의 제안이기도 했고 다이무스의 부탁이기도 하다. 개인사정으로 다니던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다음엔 뭘 해야 할까 고민하던 릭에게 벨져가 말을 던졌다. 그리고 허가한 게 다이무스다. 릭은 항상 다이무스 홀든이라는 벨져의 형이 어려웠다. 벨져 또한 다루기 힘든 인물임은 분명하나 다이무스는 그 이상이다. 벨져의 고집에 교과서 같은 윤리관이 덧대어진 견고함. 다이무스 홀든이라는 사람은 비록 릭보다 네 살이 어렸으나 그 고집과 빈틈없는 도덕성은 마치 릭보다 이삽십 년은 더 산 것 같은 행색이다. 당연하게. 다이무스가 허락하지 않을 거라 예상했다. 아마도 두 사람의 관계를 눈치채고있을 그 첫째가. 애인을 가정교사로 고용해달라는 동생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리가 있나. 그랬건만 아니나 다를까. 벨져가 릭을 다이무스의 앞에 데려가니 다이무스는 크게 고민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벨져가 잠시 자리를 뜬 사이에, 릭이 묻는다. 정말 벨져에게 가정교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오? 다이무스는 첫째 동생의 연인을 빤히 바라본다. 그리고 릭의 질문으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영 미덥지 못한 듯 한숨을 푹 쉰다. 한숨 소리가 릭의 귓가를 쿡쿡 찔렀다. 이런 배려 없는 동작은 첫째와 둘째가 그야말로 판박이다. ――네 말이라면 벨져도 듣겠지. 다이무스의 입에서 나온 말이 그것이었다. 그의 성질 탓인지 홀든의 장남은 길게 말을 붙이지 않았으나 릭은 직감으로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았다. 부모 노릇을 대신하다시피 하는 벨져의 형이 릭에게 바라는 것은 지식의 전수가 아니다. 어느쪽이냐 하면 교육은 교육이되 인성이나 사회성에 관련된 쪽이라 하는 게 옳겠지. 그냥 벨져 하는대로 포기하고 내버려두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 약간 놀라면서도 아무래도 좋을 노릇이었다. 릭으로서는 어찌 되었건 간에 저와 벨져의 사이를 딱히 가로막지 않는다면야 아무렴 좋을까. 그렇게 생각했다. 그 시점에서는. 이제 고작 다섯 번째 수업. 벨져 홀든이 이렇게 골치 아픈 사람이라고 모르지 않았다. 잘 알고 있다. 다만 다이무스의 말에 과거의 자신은 한마디를 덧붙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내 말이라고 들을 리가 있소? 뻔히 알고 있었는데 무슨 자신감이었을까. 한숨이 절로 나오고 고개가 설레설레 움직인다. 그렇다고 이대로 지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혀를 작게 차고 턱을 받치는 손목을 잡아 제 쪽으로 끌었다. 시선이 맞는다. “벨져, 내가 지금 그대의 가정교사라는 거, 알고 있소?” “알고 있다.” “그러면 이게 본론이 아니면 뭐가 본론이라 생각하는 거요?” 다른 한 손 검지로 참고서를 톡톡 친다. 벨져의 시선이 릭의 손끝을 바라보다가 다시 릭의 눈을 응시한다. 대답은 없다. 묘한 긴장감이 둘 사이로 장막을 드리운다. 잠시 방심한 찰나. 손목을 잡힌 채 벨져가 몸을 내밀었다. 차마 반응하기도 전에 볼에 부드러운 감촉이 닿는다.